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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자 씨

도서관의 책장과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구민자씨가 일전에 내민 쪽지가 손에 잡히지. 너는 이것을 만지작거리다 꺼내서 반쯤 펴고 읽기 시작하려는 순간이야. 도서관에는 중년인지 할머니인지 딱히 감을 잡기 어려운 나이의 그렇지만 무척 키가 커 보이는 사서가 의자 깊숙이 앉아 모니터에 열중하고 있어. 역시나 그녀가 쓴 쪽지의 내용은 수수께끼의 실마리들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어. “…그들은 갑자기 후끈한 열기 같은 것을 느꼈는데 후안은 그것이 술 때문일 것이라고 곤잘레스에게 말했고 곤잘레스는 동시에 느꼈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쪽지를 읽는 동안 너는 뿌연 경계 바깥 쪽 공간으로 나와 있고 구민자씨가 추적했다던 히터에서 나온 따스한 온기가 너의 이마를 스쳐지나간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해. 너는 굉장히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엉뚱한 환타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구민자씨를 조금은 알 수 없는 작가라고 생각하면서 “마라톤을 8일에 걸쳐서 완주하다니 그게 마라톤이야?”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는지 너는 현실로 다시 돌아와 둘레를 살펴봐. 원형의 서고에서 보이는 겹겹의 책장들이 저 멀리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방사선으로 줄줄이 늘어서있는 모습은 푸코의 판옵티콘이 이런 느낌이겠다는 생각을 들게 해. “진리의 양이란 이렇게나 방대한 것일까?” 도서 소장고에 신청해서 우아하게 받아들은 플라톤의 <향연 (symposion)>을 하루 종일 읽어. 여섯시. 쫓겨나듯 책을 돌려주고 나니 구민자씨가 모이라고 한 <향연>의 장인 옥상을 향해 발을 재촉할 시간이다. 그 옛날 이미 그리스시대 부터 플라톤과 같은 대 철학자는 향연을 베풀며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렸고 그 내용은 글로 남아 후대인이 사고의 체계를 만들어 가는데 기준이 되고 있지. 그렇지만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있는 저 둥근달 아래에서 이미 <향연>을 읽었거나 연애를 해도 서너 번은 했었을 30세의 구민자씨와 친구들은 열두 시간동안 사랑에 대한 잡담을 나누게 돼. 삼십 세라는 나이는 사랑을 정의 내리기에 너무 어려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일까? 혹은 플라톤이 말한 사랑은 모두 bullshit 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향연이라는 글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말하겠다는 것인가? 지성인이면 알고 있어야 하는 사랑의 상식, 권위 있는 철학자가 말하는 진리 바깥쪽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바깥쪽에는 진리가 버린 짜투리의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너는 생각하고 12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언뜻이나마 감이 잡히기를 바라며 건물의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해.

신현진 /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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